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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아부 사이프의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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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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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도 없지는 않겠지만 검술은 특히나 정황을 보고 판정하는 부분이 큰 편이다. 이는 결국 진검이라는 무기의 위력을 대련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검으로 후려치면 그냥 죽는다. 그렇다고 진검의 칼날만 죽이고 사생결단 울트라컨택룰로 싸우면 실전에 가까울 것이냐면 전혀 그렇지도 않다. 진검이라면 빈틈투성이의 상대의 손가락만 내리쳐도 손가락이 절단되거나 최소 근육 인대가 절단되어 더이상 싸우지 못하지만 칼날이 둔하면 그냥 참고 달려들어 칠 수도 있다. 한마디로 타격무기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120%풀컨택이라고 할지라도 칼날의 존재 여부만으로 싸움이 이렇게 달라지니 목검이나 가죽 패드검 같은 특성이 틀린 장비라면 더더욱 바뀔 수밖에 없다. 흔히 사람들이 목검이나 블런트 같은 걸로 지옥 대결을 펼치면 진검과 똑같은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검 실전과 비슷하려면 결국 진검으로 실전을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검술을 연습한다는 건 장기적으로 실력을 싾기 위함이니 당연히 이런 사생결단 지옥대결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 한번 대련하고 시체가 되던지 몇개월 병원신세를 지거나 평생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인데 결국 최소 몇달 길게는 영원히 실력을 싾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우컨택에 먼저맞는 걸로 정해버리면 그때는 다른 방향으로 난리가 나게 된다. 실전이라면 살가죽도 못자를 툭치기로 먼저 치고는 내가 이겼고 넌 죽었다고 주장한다던가, 또 그거에 당하고는 열받아서 자기도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실전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경기용 요령만 남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합칼>이라 불리는 것의 등장이다.

아예 다필요없고 시합만 이기면 된다는 걸로 나간다면 모르겠지만 진검술을 표방하는 곳들은 다들 이런걸 엄청나게 경계한다. 그래서 "실전이라면 이렇게 쳤을 때 마땅히 상대는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되었을 것이다" 라는 것을 전제로 그 기준에 부합하는 동작, 궤적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이겼다고 인정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정황판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진검술을 표방하거나 따로 떨어져나왔더라도 진검술 훈련에서 유래되었을 경우 그 흔적이라도 가지고 있다. 펜싱 플뢰레는 스몰소드 진검술의 훈련체계이기 때문에 상대의 검을 막고 나서 몸통만 찌르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찌르면 내가 죽기 때문이고 팔다리를 찌른다고 상대가 전투불능이 되지 않으며 안면은 실전에선 빗나가기 쉽고 도장에서는 동료를 크게 다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즉 나름 진검 실전에서의 효용성을 따지고 드는 룰이다. 검도에서 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완벽한 상황을 만들고 쳐야만 점수를 주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결국 이런 정황판정의 문제는 진검술을 표방하는 곳이라면 어쩔 도리는 없는 것 같다. 우리 팀의 경우 어떠한 룰의 개입은 가능한 한 배제하지만 그대신 일종의 정서적 불문율로 이것이 되어 있는데 그 기준이란 일단 최소한의 궤적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검이든 몽둥이든간에 위력을 가지려면 최소한의 이동거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호구 스파링에서는 어쨌든 라이트컨택이므로 타격력이나 고통으로 판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곧잘 중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이렇게 정황판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최소한의 궤적 없이 닿았다면 눌러썰어버리는 모션을 취하여 확실하게 인지를 시켜야만 인정한다. 그냥 닿은 걸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 두가지가 우리 팀에서는 정황판정의 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황판정을 주지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강요가 아닌 납득을 시켜줘야만 하는데 정황판정의 특성을 규정하는 데에는 검리의 특징이나 도구가 가진 특성이나 저지력의 차이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이러한 방식이 연습에서 유효함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에뻬가 전신 유효인 것과 듀얼링 사브르가 찌르듯이 툭 건드려도 이기는 건 결투의 룰이 피만 나면 지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롱소드나 사이드소드, 일본도가 크고 강하게 칠 것을 요구받는 건 상대의 중추신경계를 정지시킬 정도의 강한 절상이 아니고서는 상대의 공세를 완전히 저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 부상 사진이나 자료로 보여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이것이 납득이 아닌 무조건 지켜야 하는 룰에 영역에 들어섰는데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발생 이유를 알려주지 못한다면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실전성을 저해하는 구속으로만 여기다가 흥미를 잃고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타 그룹과의 분쟁에서는 대체적으로 연습도구를 이용한 타격무기 싸움의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일단 승부가 걸리면 친선 경기이므로 도구를 쓰기는 해야 하지만 자존심상 정황판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에 나나 상대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두들겨패지 않고서는 관객들이나 상대방에게 납득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 팀의 정황판정 룰이 상대방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팀은 어느정도 타격력이 자기 몸에 느껴져야만 인정하고 한국 팀은 타격 자체는 약하더라도 몸의 궤적이나 검의 궤적이 충분했다고 여기거나 정확히 슈니트 모션을 보여준다면 인정한다. 이 차이는 작년 미국멤버의 방문 때 드러나기도 했다. 같은 그룹도 이러니 그룹이 다르다면 볼 것도 없다. 이런 경우 룰을 정하고 심판을 세워 경기화된 방식으로 승부를 낼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도로 <시합칼>의 문제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검을 회초리처럼 휘둘러서 출렁이는 칼끝으로 득점하는 펜싱 플뢰레의 모습이 이런 걸 잘 보여준다.

그래서 타 그룹과의 현피는 도움이 되는 만큼이나 쓸데없다. 정확히는 상대가 얼마만큼이나 나를 이기고 싶어하는지 또는 증오하거나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말 그대로 자신의 실력을 진검술의 정황적 기준에 따라 시험하고 싶은 것인지 등을 미리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자를 상대한다면 더이상 진검술의 실력 비교가 아니라 타격무기를 이용한 풀컨택트 실전이라는 다른 분야가 되었음을 염두해두고 그에 맞춰서 전술과 장비를 셋팅할 필요가 있고 후자라면 편안한 기분으로 대련하고 서로 교류할 수 있으면 된다. 둘다 나름 얻는 것이 있지만 진검술적인 측면에서는 후자가 훨씬 얻는 것이 많다. 하지만 타 그룹과의 분쟁이라면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정황판정이 훈련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는 진검 전투술 분야에서는 별로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이다.

정황판정은 진검 전투술 부문에서 타 그룹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데 진검술을 표방한다면 실전과 연습에서 생기는 괴리를 메우기 위한 정황판정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른 보아 타그룹의 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그 정황판정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납득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상대가 훌륭한 체계를 가졌는지 그냥 엉터리인지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다. 엉터리라면 무시하면 그만이고 훌륭한 체계를 가졌더라면 일단 우월은 사람 실력이나 배움에 따라 갈리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오래된 진검술 유파/그룹들이 노인정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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