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리브 공세를 눈앞에 두고 간단하게 이들리브 대패를 정리해봤습니다. 타이거가 이들리브에서 2015년에 개털렸다 라는 이야기는 자주 나오는데 구체적으로 당시 공세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정리한 적은 없었네요.
이들리브 시는 이들리브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16만 5천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도시 자체의 생산성은 그냥 그렇지만 터키 국경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연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 한들 2011년 9월부터 적극적으로 반란군이 일어나 정부군에 대항했던 전력이 있었고 결국 2012년 3월 정부군에 재탈환된 바 있어 정치적 상징성도 크고 이들리브 주의 완전 통제를 막는 전략적인 방해물이었기 때문에 2014년에도 한번 알 누스라 전선 주도의 대공세가 있었고 2015년에 들어 2월 에도 다시 아흐라르 알 샴, 알 누스라 전선 주도로 공격이 있었지만 정부군이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2015년 2월 이들리브 공세, 2월 26일자 전황도
방어에 성공한 정부군. 3월 5일자 전황도
정부군은 탈영과 병력 부족, 알카에다 전사들의 풍부한 경험과 터키 카타르 사우디 프랑스의 자금 군사 지원으로 인해 교외 시골 지역의 통제는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주요 도시와 도로 축선을 중심으로 뭉쳐서 방어하고 있었고 지휘체계와 항공기 운용 가능이라는 이점으로 인해 이런 도시 지역은 잘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비교적 덜 중요한 전선에는 2013년부터 이란-이라크 시아파 민병대들이 도와주고 있어서 정예 정규군을 필요한 지역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장점도 있었고요.
반면 반군은 숫자 자체만 놓고 보면 정부군보다 많기는 했으나(2015년 당시 약 15만 추정) 각 지역별로 실병력 중대-대대급 그룹들이 따로따로 놀고 있었고 지역별로 정부군 공세에 대응해 연합작전실을 구성하고는 있었으나, 그것도 지역 방어에나 좀 쓸모가 있었지 전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통제 가능한 통합 작전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부군이 각잡고 방어하면 아무리 반군의 타이거부대 취급을 받는 알 누스라 전선, 준드 알 아크사, 안사르 알 샤리아 등의 알카에다 지하드 그룹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곳에 공격을 받으면 다른 데서 병력을 빼와서 집중투입하면 결국 못뚫는거죠. 이 문제는 반군도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알 누스라 전선은 이들리브 2월 공세 실패를 계기로 이들리브 지역의 자유시리아군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반군 연합체 "정복의 군대" (جيش الفتح, Jaish al-Fatah)를 2015년 3월 24일자로 창설합니다. 카타르의 전폭적인 지원과 이슬람 성직자 압둘라 알 무헤이시니의 각 그룹의 중재로 인해 누르알딘 알 젠키 운동 등의 여러 그룹은 잠시간의 대립을 관두고 알 누스라 전선 주도의 이들리브 2차 공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3월 24일 준드 알 아크사 소속의 병사 둘이 이들리브 동쪽 검문소에 자살폭탄을 터뜨리면서 3방향에서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동쪽의 타일 공장과 공동묘지, 북서쪽의 예비군(NDF)진지와 유스하우징이 정복의 군대에게 점령당했고, 이들리브 주둔 11기갑사단이 반격을 개시하여 4개의 검문소 진지와 유스하우징 일부를 재탈환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인 3월 25일 자살폭탄 공격과 함께 정복의 군대가 4개 검문소를 재탈환했고 정부군 11기갑사단이 전차를 보내어 이들리브 시 동쪽 공장지대에서 대격전을 벌였고 이때 아흐라르 알 샴의 부사령관 아부 자밀 유수프 쿠틉과 헤즈볼라 지휘관 하지 왈라도 사망하게 됩니다.
알 누스라 전선은 미국제 TOW미사일을 펑펑 쏴댔고 정부군은 크게 밀려 결국 17개 검문소진지와 전방진지를 모두 상실하고 동쪽 공장지대도 정복의 군대에게 넘어갔으며 알 시나이 공업단지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결국 3월 26일에는 시아파 마을인 카프리야-후아와 이들리브 시가 단절, 카프리야-후아 마을은 정복의 군대에 포위당합니다.
3월 26일 2015 이들리브 2차 전투 전황도
3월 27일 정부군은 여전히 격전을 벌였으나 이미 주요 진지와 방어선을 잃어버리고 전차가 TOW미사일에 속속 터져나가는 와중에 계속해서 밀렸으며, NDF(예비군)이 북쪽 곡물 저장소에서 퇴각하자 정복의 군대는 결국 도시 외곽에 진입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28일 NDF병력이 증원되어 격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24개 검문소가 탈환당하고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군은 이들리브 시를 포기하고 남쪽의 알 마스토마로 총퇴각을 개시합니다.
3월 28일 이들리브 2차 전투 전황도
3월 28일 이들리브 중심가에 입성하는 정복의 군대
이들리브 중심가에서 보도하는 반군 리포터
이들리브 남쪽 알 마스토마로 퇴각하는 정부군을 포격하는 정복의 군대
이들리브 공세를 응원하는 알레포 캄 알 자발 구역의 시민들
![]()
이들리브 공세를 응원하는 알레포 셰이크 마크수드 구역의 시민들
아흐라르 알 샴과 알 누스라 전선은 이들리브 시에 샤리아 통치가 실시될 것이라 발표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반정부운동의 구심점(笑) 시리아 임시정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복의 군대나 알 누스라가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을 것이라 발표하고 실제 반정부 시민단체들이 행정 업무를 맡고 반군은 상업 보호를 장악하고 군사 부문에 집중하는 이원화된 통치체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 체제는 2017년 파타 알 샴(구 알 누스라 전선)을 터키의 입김을 받은 시민 행정 조직이 탄핵하는 성명을 내면서 열받은 파타 알 샴이 시민 행정조직을 싸그리 내쫓고 어설픈 샤리아 통치를 실시하기까지 계속됩니다.
4월 4일 전황도
여하간 정복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알 마스토마의 정부군에게 강공을 펼치지만 이미 알 마스토마 언덕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한 정부군을 몰아내기는 어려웠고 증원을 받은 정부군이 이들리브 시내에 포격과 공습을 가하면서 정부군도 정복의 군대를 향해 역습을 단행, 정복의 군대도 전과에 만족하고 전투를 종결하게 됩니다.
4월 8일 전황도
반군에게 이들리브 시 재장악은 한마디로 대사건이었는데 알레포, 하마, 홈스와 더불어 반정부 운동의 수도격이었고 막대한 정치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13도 창의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선왕실의 고향 전주를 탈환한 것과 동급의 대사건이었다고 보면 될 정도입니다. 한편 정부측에게도 이 문제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절치부심하고 전 전선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차출하여 총 5000명의 병력을 이들리브 알 마스토마 시로 증원하게 됩니다.
![]()
tag : 시리아, 내전, 시리아내전, 타이거대령, 수헤일알하산, 이때는좋았다
이들리브 시는 이들리브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16만 5천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도시 자체의 생산성은 그냥 그렇지만 터키 국경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연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 한들 2011년 9월부터 적극적으로 반란군이 일어나 정부군에 대항했던 전력이 있었고 결국 2012년 3월 정부군에 재탈환된 바 있어 정치적 상징성도 크고 이들리브 주의 완전 통제를 막는 전략적인 방해물이었기 때문에 2014년에도 한번 알 누스라 전선 주도의 대공세가 있었고 2015년에 들어 2월 에도 다시 아흐라르 알 샴, 알 누스라 전선 주도로 공격이 있었지만 정부군이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정부군은 탈영과 병력 부족, 알카에다 전사들의 풍부한 경험과 터키 카타르 사우디 프랑스의 자금 군사 지원으로 인해 교외 시골 지역의 통제는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주요 도시와 도로 축선을 중심으로 뭉쳐서 방어하고 있었고 지휘체계와 항공기 운용 가능이라는 이점으로 인해 이런 도시 지역은 잘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비교적 덜 중요한 전선에는 2013년부터 이란-이라크 시아파 민병대들이 도와주고 있어서 정예 정규군을 필요한 지역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장점도 있었고요.
반면 반군은 숫자 자체만 놓고 보면 정부군보다 많기는 했으나(2015년 당시 약 15만 추정) 각 지역별로 실병력 중대-대대급 그룹들이 따로따로 놀고 있었고 지역별로 정부군 공세에 대응해 연합작전실을 구성하고는 있었으나, 그것도 지역 방어에나 좀 쓸모가 있었지 전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통제 가능한 통합 작전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부군이 각잡고 방어하면 아무리 반군의 타이거부대 취급을 받는 알 누스라 전선, 준드 알 아크사, 안사르 알 샤리아 등의 알카에다 지하드 그룹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곳에 공격을 받으면 다른 데서 병력을 빼와서 집중투입하면 결국 못뚫는거죠. 이 문제는 반군도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알 누스라 전선은 이들리브 2월 공세 실패를 계기로 이들리브 지역의 자유시리아군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반군 연합체 "정복의 군대" (جيش الفتح, Jaish al-Fatah)를 2015년 3월 24일자로 창설합니다. 카타르의 전폭적인 지원과 이슬람 성직자 압둘라 알 무헤이시니의 각 그룹의 중재로 인해 누르알딘 알 젠키 운동 등의 여러 그룹은 잠시간의 대립을 관두고 알 누스라 전선 주도의 이들리브 2차 공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3월 24일 준드 알 아크사 소속의 병사 둘이 이들리브 동쪽 검문소에 자살폭탄을 터뜨리면서 3방향에서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동쪽의 타일 공장과 공동묘지, 북서쪽의 예비군(NDF)진지와 유스하우징이 정복의 군대에게 점령당했고, 이들리브 주둔 11기갑사단이 반격을 개시하여 4개의 검문소 진지와 유스하우징 일부를 재탈환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인 3월 25일 자살폭탄 공격과 함께 정복의 군대가 4개 검문소를 재탈환했고 정부군 11기갑사단이 전차를 보내어 이들리브 시 동쪽 공장지대에서 대격전을 벌였고 이때 아흐라르 알 샴의 부사령관 아부 자밀 유수프 쿠틉과 헤즈볼라 지휘관 하지 왈라도 사망하게 됩니다.
알 누스라 전선은 미국제 TOW미사일을 펑펑 쏴댔고 정부군은 크게 밀려 결국 17개 검문소진지와 전방진지를 모두 상실하고 동쪽 공장지대도 정복의 군대에게 넘어갔으며 알 시나이 공업단지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결국 3월 26일에는 시아파 마을인 카프리야-후아와 이들리브 시가 단절, 카프리야-후아 마을은 정복의 군대에 포위당합니다.

3월 27일 정부군은 여전히 격전을 벌였으나 이미 주요 진지와 방어선을 잃어버리고 전차가 TOW미사일에 속속 터져나가는 와중에 계속해서 밀렸으며, NDF(예비군)이 북쪽 곡물 저장소에서 퇴각하자 정복의 군대는 결국 도시 외곽에 진입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28일 NDF병력이 증원되어 격전을 벌이기는 했으나 24개 검문소가 탈환당하고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하자 정부군은 이들리브 시를 포기하고 남쪽의 알 마스토마로 총퇴각을 개시합니다.

3월 28일 이들리브 중심가에 입성하는 정복의 군대
이들리브 중심가에서 보도하는 반군 리포터
이들리브 남쪽 알 마스토마로 퇴각하는 정부군을 포격하는 정복의 군대



아흐라르 알 샴과 알 누스라 전선은 이들리브 시에 샤리아 통치가 실시될 것이라 발표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반정부운동의 구심점(笑) 시리아 임시정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복의 군대나 알 누스라가 권력을 독점하지는 않을 것이라 발표하고 실제 반정부 시민단체들이 행정 업무를 맡고 반군은 상업 보호를 장악하고 군사 부문에 집중하는 이원화된 통치체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 체제는 2017년 파타 알 샴(구 알 누스라 전선)을 터키의 입김을 받은 시민 행정 조직이 탄핵하는 성명을 내면서 열받은 파타 알 샴이 시민 행정조직을 싸그리 내쫓고 어설픈 샤리아 통치를 실시하기까지 계속됩니다.

여하간 정복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알 마스토마의 정부군에게 강공을 펼치지만 이미 알 마스토마 언덕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한 정부군을 몰아내기는 어려웠고 증원을 받은 정부군이 이들리브 시내에 포격과 공습을 가하면서 정부군도 정복의 군대를 향해 역습을 단행, 정복의 군대도 전과에 만족하고 전투를 종결하게 됩니다.

반군에게 이들리브 시 재장악은 한마디로 대사건이었는데 알레포, 하마, 홈스와 더불어 반정부 운동의 수도격이었고 막대한 정치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13도 창의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선왕실의 고향 전주를 탈환한 것과 동급의 대사건이었다고 보면 될 정도입니다. 한편 정부측에게도 이 문제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절치부심하고 전 전선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차출하여 총 5000명의 병력을 이들리브 알 마스토마 시로 증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재탈환 작전의 선봉을 맡기 위해 타이거 대령, 수헤일 알 하산이 도착하게 됩니다.

tag : 시리아, 내전, 시리아내전, 타이거대령, 수헤일알하산, 이때는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