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무술은 체계화가 안 된 것은 아니나 현대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중구난방이다. 옛 무술은 기억술을 활용해 체계를 암기하게 만드는 "검결" 같은 싯구를 두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기술을 연습하면서 거기에 내제된 전투의 원리를 기술 연습을 통한 모의 전투를 통해 깨닫게 하는 방식이다. 검결을 통해 기억의 뿌리에서부터 자라나 기술이 기둥에서 가지로 뻗어 나가듯이 하나의 큰 나무를 형성하는 시스템이다.
그에 비해 현대는 개개의 기술보다는 각 원리를 따로 빼내서 죽 늘어놓은 다음 이 원리를 스파링을 통해 스스로 적용해보도록 하는 방식이다. 물론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옛날 체계에 비하면 그 숫자가 아주 적고 단순하다.
옛날 체계는 특이하게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데, 15세기 리히테나워류도 그렇지만 중국도 비슷한 체계를 가지고 있고 일본도 일도류나 기타 유파들을 보면 검결은 없어도 여러 기술들을 통해 검리를 획득하게 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래서 이 방식으로 무술을 배우게 되면 어떻게 이 기술연습 없이 성취가 되느냐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다.
변화
그렇다면 언제부터 옛날 체계에서 현대 체계로 넘어갔는가? 서양은 대략 16세기부터 그 싹이 트기 시작한다. 이미 리히테나워 같은 경우 15세기부터 링겍,단직 등이 검리를 17개로 나눠 정리하면서부터 시작했고, 16세기 중반쯤에는 기존의 검결이 무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요아힘 마이어 시대쯤 되면 더 분화된 개념과 자세를 쭉 늘어놓고 간략한 설명과 어디에 쓰이는가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나름의 체계화가 제법 진행된 티가 난다.
이탈리아도 비슷해서 16세기를 거치며 자세나 기술이 중구난방으로 있던 과거 검술(다르디 학파)의 세태를 비판하고 숫자로 이루어진 직관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자세명을 만들며 공방 기술도 간략화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안젤로 비지아니를 통해 나타난다. (다만 다르디 학파 정도도 15세기 리히테나워와 비교하면 상당히 정제된 타입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여전히 기술을 통해 검리를 학습한다는 내용면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한 교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스파링을 통해 기술을 겨루는 체계가 확실히 드러났던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리히테나워류는 요아힘 마이어를 보면 맞고도 인정 안하고 한대 더치거나 반항적인 상대를 치고 묶어버리는 예시가 자주 나오고 이는 상당히 경쟁적인 스파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탈리아는 숫제 기술을 겨루는 세미스파링 격의 아샬티, 승부를 가리기 위해 진짜로 싸우는 압바띠멘띠 두가지로 스파링을 구분한다.
교습에서의 스파링의 도입이 이런 체계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서면 이런 체계화가 급격하게 완성되는데, 스캇츠 올드 스타일에 대한 토마스 페이지의 Use the Broadsword문서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며, 좀 더 시간이 지나 헨리 안젤로스의 브로드소드 검술 체계를 보면 사실상 현대와 다를 바 없이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기본기를 익히고 체계적으로 늘어놓은 요소로써의 검리를 스파링에서 직접 적용해보는 시스템이며, 이는 현대의 서양 스포츠 즉 펜싱이나 복싱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시스템이다.
중국의 경우는 20세기 초까지 옛날 체계로 움직이다가 신해혁명 이후 중앙국술원의 등장으로 중국무술이 한데 모이면서 점차 체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현대 우슈에 이르러 전통권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설명에 대응해 현대적이고 확실한 개념과 체계의 재정립을 이룩했다고 알려져 있다.
비교
아주 옛날 체계는 기본적으로 기억술에 의지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검결로 하거나 또는 책, 두루마리 같은 것으로 시동을 걸로 특유의 고유 용어를 쓰며 검리를 따로 빼서 나열하기보다는 기술 연습을 통해 다양한 검리를 깨우치게 하는 방식이고,
과도기적 체계는 옛날 체계의 특징을 상당부분 보유하고 있으며 여전히 기술 연습을 통해 검리를 깨우치게 하고는 있으나 검리 자체를 빼서 나열하고 목록화시키는 과정이 드러나고 추상적인 부분이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며,
현대적 체계는 추상적이고 이해가 힘든 고유 용어도 치워버리고 현대인들이 쓰는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설명하고(ex: 분노의 베기 -> 대각선내려베기) 개념을 늘어놓고 이를 각자 자유롭게 적용해볼 수 있도록 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과거처럼 많은 기술에 의지하여 검리를 역추적하도록 하는 방식은 쓰지 않는다.
현대적 체계는 접근이 쉽고 배우기 쉬우며 이해하기 쉽고 바로 스파링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효율적이지만 반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사실상 기본기에 검리 좀 얹어 쓰는 식이기 때문에 빠르게 한계에 봉착할 수도 있다.
옛날 체계는 정확히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체계라고 무조건 접근이 어렵고 배우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처음에 특유의 용어를 기억하고 적응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스파링에 쓰이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대신 다양한 기술을 심도있게 연습하기 때문에 각 개념을 좀 더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는데 현대적 체계 하에서는 자기가 잘하는 기술 몇개로 고정되고 스파링만 많이 하기 때문에 잘하는 건 더 숙달이 되지만 못하는건 계속 안쓰고 연습도 안되는 편중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나도 똑같이 겪는 상황이다.
뭐가 더 나은가?
어느 방식이 더 우월한가에 대해서는 나도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한때는 현대적 체계가 가장 낫고 옛날 체계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결국 단순한 기술 몇가지로만 스파링하는 한계를 절감하고 옛 예시를 찾음으로써 그 한계를 돌파하는 단초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생각을 고정할 수는 없다.
한편 그렇다면 현대적 체계를 기반으로 옛날 체계나 기술은 데이터베이스로 삼아서 막힐때 꺼내 쓰는 방식으로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식이라면 역시 그 기술이나 개념은 맛만 보고 마는 수준으로 끝나고 어찌어찌 쓰는 기술만 잘 쓰게 되는 상황이 된다. 스파링하다가 생각이 나서 아 이런 게 있었지 하고 쓰게 되어도 숙달이 부족해서 실패하게 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옛날 방식으로만 할 수도 없는데 실제로 쓰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숙련도에 비해 스파링 적응도가 많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취미로 검술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여러가지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15세기 리히테나워류를 할 경우 체계 자체가 옛날 것이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디서 비틀리기 쉽상이다.
이런 문제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함부로 결론을 낼 수 없지만 16세기의 체계가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아샬티 체계가 좋다고 보는데 아주 격렬하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정도 심리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그 여유 속에서 자기가 써보지 않은 검리나 기술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스파링과 기술연습 사이에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이것도 기본기가 확실히 숙련되고 기본기 안에서 움직이며 승부보다는 틀 안에서 이기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연습을 등한시하고 이기는 것만 생각하면 안된다. 사실 팀내에서도 아샬티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풀 컴페티션보다는 검리의 숙달 그리고 비효율보다는 효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가장 나은 대안이다. 현재까지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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