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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아부 사이프의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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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대 12화 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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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후에는 다시 올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얼마나 변했는지를 기대해 보지."

라는 멘트를 남기고 떠난 요시노부 덕택에 일은 매우 좋게 진행되고 있던 참이다. 요시노부의 직접 인증과 박계장님이 친히 주선한 시청 고위공무원들에 대한 "성의" 덕택에 총기의 구입 요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 행정기관장의 허가는 떨어졌다. 나의 구상에 가장 중요한 일보 전진의 기반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자칭 거액의 예산(정확한 액수는 말 안해주더라)을 지원한 요시노부 덕택에 미국에서 대원들에게 지급할 P53엔필드 라이플드 머스킷의 구매가 막 이루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참고로 우리는 현대 군대가 아니다. 근대 이후의 군대는 원체 나라가 옷도 주고 장구류도 지급해주고 총기와 탄약도 다 주는 것이 기본이라 당연히 주겠거니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원래 내 돈 내고 사지 않은 장비는 험하게 막 다루다 쉽게 고장내고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큰돈 내고 산 내것이어야만 비로소 제대로 다루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봉건제 국가의 군사장비 유물은 많지만 중앙집권제 국가의 유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 것도 이것에 기인하고 있다.

장구류 포함 1인당 200만원을 좀 넘는 장비를 스스로 구입해야 한다는 것에 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달 140만원, 그것도 상황 따라 가끔은 더 적은 돈을 받으며 근근히 입에 풀칠하고 개중에는 그걸로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도 있는데, 200만원을 좀 넘는 수준의 금액을 지출하라니 경악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전습대 예산으로 절반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월부로 나눠서 낸다고 하니 좀 안도하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시커먼 얼굴빛에 다크 오오라를 내뿜는 대원이 1/3은 되었다. 하지만 무력이 우리의 수익구조가 될 테니 이것은 투자로 보는 것이 옳다. 어차피 나중에 몇배로 돌려받게 될 것이다.

"김추자씨, 여긴 페이팔 안 받는다는데?"
"페이팔 안 받으면 카드는 받아요?"
"현금만 받는다는데..."
"페이팔도 안되고 카드도 안되면 안되요. 다른 데 찾아주세요."

요시노부가 주고 간 예산은 절대적으로 경리 가네야마 아키코(金山 秋子)의 손에 있다. 모든 결제권한이 그녀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요시노부가 준 예산은 허투로 쓰고 싶어도 그리 할 방도가 없었다. 원래 회사에서야 허당 영수증으로 은근히 예산 빼먹기를 하지만, 과연 요시노부가 최고의 경리라고 말한 만큼 잡품 같은 걸 일일이 결제해주지는 않는다. 과연 큰 건수만 결제해주고, 슬쩍 나가서 전화한 다음에야 승낙을 하는 걸로 봐선 요시노부에게 직통으로 허가를 받는 모양이다.

"김추자씨, 여긴 된다고 하네. 일단 선금으로 1정당 150달러 선불이고 인수받으면서 나머지 결제해도 된다고 하는군요."
"예 알겠어요. 그런데 깅츄쟈는 그만둬받을수 없겠어요? 전 가네야마 아키코라는 이름이라구요. 가네야마로 불러주세요."
"이전에도 말했듯이 가네야마 아키코(金山 秋子)를 음독하면 깅잔 츠시(金山 秋子)이고..."
"저를 존중한다면 가네야마로 불러주세요. 놀리는 거 맞죠? 그 사람들 봉행씨가 깅츄쟈라고 하면 다들 웃는다구요!"

봉행씨란 요시노부가 나를 전습대봉행(傳習隊奉行)이라 지칭한 이후 김추자가 나를 적당히 부를 호칭이 없자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들끼린 일본어로 대화하니 발음은 부교시(奉行氏)이다. 아무튼 김추자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 경리를 당장 재울 데가 없어서 집에 데려왔을 때 여중딩 김 아무개가 발광하는 시점에서 생각난 이름인데, 어차피 가네야마 아키코는 금산 추자고, 한국식으로 어레인지하면 딱! 김추자가 된다. 처음에는 한국에서의 적응에는 딱 좋은 이름이라며 한자를 써서 보여줬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납득하더니, 사람들이 자꾸 킬킬대니까 뭔가 한국에서 웃긴 이름으로 인식하는 듯 싫은 티를 엄청나게 내고 있다.

"그건 연예인 생각이 나서 그렇지.. 70년대의 섹시 아이콘 여가수가 김추자라 하지 않았소?"
"싫어요. 싫다구요. 섹시도 싫고 가수도 싫어요. 날 놀리는 거라구요."
"아무튼 결제부터 합시다."
"약속부터 해 받기 전에는 어림없어요."

그러더니 일어서서는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안방 문이 슬쩍 열리더니 김 아무개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그 표정은 한심하다는 뜻의 썩소임에 틀림없다.

"나갔어?"
"곧 오겠지."

안그래도 어제 방문을 잠그고 질질 짜면서 한국 싫어, 집에 갈래, 한국 발냄새 시루 싫어 등을 연발하고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망은 안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요시노부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을 하지만 요시노부는 무조건 내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말이다. 안그래도 요시노부가 나에게 직통으로 전화해서는 저래도 곧 적응하는 애지만 아무튼 조금만 배려해주라는 언급과 함께 내가 알아서 할테니 절대 위로하거나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상황이다. 오늘은 아마 십중팔구 김추자 네이밍에 대해 하소연을 하겠지만 100% 요시노부의 퇴짜만 맞고 다시 슬금슬금 기어들어올 것임에 틀림없다.

"온지 일주일은 된거 같은데 왜 아직도 안나가는거야? 방에 아주 살림을 차렸던데?"
"갈데가 없다던데?"
"호텔방이나 머 그런것도 있을 거 아냐? 아니 지하 월세방은 빈다매? 난 외갓녀자랑 같은 지붕 싫어, 얼릉 내보내라구!"
"사무실도 없는데 그럼 어찌 얼굴 보고 일을 처리하누?"
"차려! 차리라구!"

김 아무개는 이럴 때는 여자 종특이 튀어나와서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온갖 간접적인 공격으로 김추자를 쫓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천상 일본인인 김추자 앞에 묵은지와 된장 찌개를 진하게 끓여서 삼시세끼 내놓는 악마적 공격에 의해 김추자는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맨밥만 좀 뜨다가 밤중에 몰래 편의점으로 도주해서 먹고 오는 등 삶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볼살은 풍성해지고 눈가의 음영은 하루하루 어두워져만 가는데...

"저래도 안나가면 내일부터 청국장으로 대체할거야. 어디 안나가는지 함 두고 보자구."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새우도 집어넣을거야?!"
"벌레..."
"벌레는 니미 깐새우는 잘도 먹으면서 왜 그냥 새우는 벌레취급이야? 내일부터 대하 넣어버릴거야!"

이 싸움에 등이 터지는 건 나다. 나는 원래 된장찌개를 먹고 힘이 나는 체질도 아니거니와 그걸 계속해서 먹이니 김추자뿐만 아니라 나도 광역 데미지를 입는 입장이었다. 진미도 하루이틀이지 된장찌개만 삼시세끼를 처먹이니 힘이 날 리가 있나. 마침 문 비밀번호를 삑삑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 김 아무개는 급히 안방으로 들어가 도로 문 사이로 얼굴만 내밀고는 또 한마디 한다.

"내일부터 두고봐!"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안방 문이 쾅 닫혀버렸다. 내일이 안 기대되는군..


다음날.


청국장 냄새에 얼굴이 잔뜩 찌그러지던 김추자는 마침내 밥을 못먹겠으니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일어났는데, 하필이면 자랑의 세미롱헤어가 청국장 국물에 푹 들어갔다가 도로 나오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정신 데미지를 두배로 받은 김추자에게서 마침내 대량의 다크 오오라가 뿜어졌고, 그걸 보는 김 아무개의 썩소에는 예수를 매질하던 로마 병사의 쾌감을 13배정도 증폭시킨 분량이 함유되어 있었다. 나도 더이상 밥먹을 처지가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전골 냄비에 팔뚝만한 그것도 안 끓이고 나중에 올려놓은 회색의 대하가 삼태극 문양처럼 3마리 배치되어 있었던 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김추자를 따라가는 척 하면서 현장을 탈출했는데 몸에 뭐가 쾅 하고 부딪친다. 보니 돌아서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날 올려다보는 김추자가 아닌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이마는 잔뜩 찌푸려지고 자랑의 세미롱헤어에서는 청국장 냄새가 나는 그녀가 곧 나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로.

"오늘 보고 느낀 거 없어요?! 저건 분명 고의적인 괴롭힘이라구요. 당신은 남자잖아요?! 뭐라고 좀 해봐요, 난 한국말 못한다구요!"
"단단히 주의를.."
"정말, 이제 몰라! 남자도 아니야! 이대론 난 죽는다구요. 나가면 되잖아요? 월세방이라도 하나 소개해줘요!"
"그게 월세방이란 것도 참 요즘 신시가지도 우범 지대가 되어놔서, 여자 혼자 산다그러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지금 당하는 봉변보단 낫겠죠, 빨리 나가게 해줘요!"
"김추자씨가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요시노부 공에게 무슨 소릴..."
"깅츄자 아니라고!"

다음날 김추자는 지하 월세방으로 들어갔다. 그 즉시 청국장은 사라졌기 때문에 나의 식생활도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김 아무개는 참으로 얼굴이 의기양양하기 짝이 없다.

"좋아?"

고개를 끄떡거리는 김 아무개는 즐거운 얼굴로 고기를 씹고 있다.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서는 설거지 통에 집어넣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참으로 얼굴도 그렇고 몸놀림도 가볍다. 이쯤해서 김추자를 필사적으로 쫓아내는 김 아무개를 보면서 혹시 하렘 루트요 캣 파이트요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법 한데, 유감스럽게도 현실엔 그런 게 별로 없고, 그 이유는 김 아무개 왈 다음과 같다.

"아저씨는 생판 본 적도 없는 사내놈이 같이 살자고 오면 좋아?"

과연 그러하다. 그러나 어쨌든 업무는 봐야 하기 때문에 김추자는 우리 집에 계속해서 하루 한번씩 드나들었고, 그럴 때마다 김 아무개는 안방 문을 닫고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 판이었다. 그러던 일주일째 김추자는 마침내 버티지 못한 듯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답답해요."
"그러니 지하방은 창문을 열어야 되요."

여기까진 조용히 말하더니 창문 운운하는 내 말투에 폭발을 시작한다.

"그게 아니구요! 말도 안 통하고 습기도 차고 공기도 안 통하고 하나도 맘에 드는 게 없다구요! 그리고 이틀 전에 새벽 3시에 뭐가 나왔는줄 알아요? 왠 미친 사내놈이 바지를 벗고 방범창 사이로(이하생략) ...이었다구요! 정말 지하방이나 주고 사람이 어떻게 스물여섯 처녀를 그런데 살게 할 수가 있죠?"
"언제 지하방 살라고 말이나 했습니까?"
"말은 안했지마는 아무튼 그런 일이 안 생기게 말렸어야죠. 아무튼 어떻게든 여기 말고는 살 곳이 없겠네요. 아무튼 남자니까 저 어린년 좀 어떻게 해주세요. 남자가 그리 권위가 없어서 어떻게 하겠어요?"
"남자는 본디 내명부 일에는 간섭을 안하는 법..."
"정말! 지금이 에도시대야?!"

아.. 누가 일본 여자가 순종적이라는 소리를 했단 말인가! 쏘아붙이는 기세로 말하자면 김 아무개 못지 않은 기력에 가발이 벗겨질 지경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발을 쓴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나는 솔직히 이런 난리를 조정할 자신이 없으니 공을 당사자들에게로 돌리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안방 문 손잡이를 열고 홱 열자

"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김 아무개가 얼굴을 돌리고 있고 안경은 흐트러져 한쪽으로 쏠려 있다. 아마 안방 문에 귀를 대고 엿듣다가 졸지에 홱 열리는 문에 밀리고 맞은 모양이다. 안경을 고쳐 쓴 김 아무개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성질을 버럭버럭 내기 시작했다.

"뭐야! 보고 열란 말이야! 왜 처녀 방 문을 홱홱 열어?!"
"아 됐고, 김추자가 너랑 다이렉트 직빵 대화를 원한단다."

"깅츄자 아니라고!"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아 몰라. 난 일본말 못하고 저 일본년이랑 말도 하기 싫으니 그런 줄 알어."
"여기 와서 살겠다는데?"
"아니 저년이?!"

씩씩대며 튀어나온 김 아무개가 김추자를 올려다보며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앞에 섰다. 둘의 키 차이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 서로 한 2초간 꼴아보더니 나를 동시에 돌아보면서 동시에 외친다.
"통역 안해줘?"
"츠야꾸 시떼구레나인데스까?!"

그리하여 중간에 낀 나의 통역 셔틀 상황이 시작되었다.

"...고의적인 괴롭힘이잖아!"
"...라는데?"

"어이구~ 로마에 오면 청국장에도 익숙해져야지 얹혀 사는 주제에 어디서 상전 대접을 바래?"
"...라는군요."

"(빠직)...로마에도 청국장이 있어~? ^오^"
"...란다."

이런 의미없는 말장난난동이 약 20여분간 계속되다가, 마침내 사태의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말이 나왔다. 회상하건데 이 말이 안 나왔으면 정말 나로써는 어디에서 개입하여 여자들의 입배틀을 종결시켜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이란...

"...머리나 기르고 옷이나 예쁘장하게 입고서는 말이야. 남자들 뒤에 숨어가지고 남자들 응딩이 뒤에 숨어가지고 직접 나서서는 아무것도 못하지?"
"...랍니다."

"하! 과연 위아래없는 계집애야. 이 집의 주인인 봉행씨의 권위를 존중해서 그러는 것이 예의범절 없는 중딩 계집에게는 안 보이나 봐?"
"...란다."

"예~ 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돠아~ 포장 하세요~ 포장~"
".......라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점점 통역이 힘들어지고 있다. 코리안 고유명사의 폭주는 전쟁 전의 일본어 문어체만큼이나 귀찮다. 여기서 김 아무개의 문제의 발언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런 계집애들 종특이 싫어서 검술도 배우고 당당하게 사는데 역시 미니스커트 펄럭이면서 사내들 홀리는 불여시가 그걸 이해하길 바란 게 내 죄지~ 죄야~"
"...랍니다."

"하! 나도 미국 대학 입학할려고 펜싱 무려 6개월이나 배웠거든?!"
"...라는데?"

"(번쩍) 아 그럼 잘됐네! 나도 이탈리안 세이버 하니까 구질구질하게 말로 할거 없이 검의 대화로 해결하자구!"
"....랍니다."

구질구질이란 단어는 번역 실패했다. 코리안 고유단어 아웃! 더이상은 Naver....
김추자는 칼로 붙자는 말에 잠깐 당황한 듯 했다. 그걸 눈치챈 김 아무개가 썩쏘를 씨익 지어보이면서

"나니, 비빗뗀노?"

라고 도발하니 김추자의 눈빛이 시퍼래진다. 뜻은 "뭐야, 쫄음?" 정도의 의미다. 김 아무개는 제대로 된 일본어는 안하고 어디서 저런 것들만 주워다 잘도 쓰는지..

그래서 집앞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나왔다. 대충 김추자가 지면 나가고 여기에 얼씬도 안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김추자가 펜싱 배웠다는 건 아무래도 헛소리는 아닌 모양으로 그중에서도 에뻬 종목을 배운 모양이다. 나는 스포츠 펜싱 무기는 없고 옛날에 잠시 사놨다가 장식용으로 틀어박힌 스몰소드 시뮬레이터가 있는데, 날길이는 전통 스몰소드의 길이에 맞춰서 81cm밖에 안된다. 김추자의 표정이 더욱 다크해진 것은 덤이다. 에뻬보다 훨씬 짧으니..

심판은 내가 보기로 했다. 눈앞에는 여자 둘이 머리를 묶고서는 느려질까봐 슈트도 안 입고, 짧은 바지에 무릎 보호대만 차고 상의는 그냥 평복을 입은 채로 한쪽은 에뻬 가드, 한쪽은 이탈리안 세이버의 미디움 가드를 취한 모습이 있다. 마스크와 장갑은 당연히 착용했다.

"인게이징!"

선공을 개시한 것은 김 아무개로, 내가 평소에 그렇게 상대의 공격을 본 다음에 버릇을 파악하고 들어가라고 노래를 불렀건만 초고속으로 런지하면서 머리로 나가는 7번베기(수직 내려베기)를 가했고 여기에 당황한 김추자가 머리를 빼면서 에뻬를 쭉 내미는 바람에 둘다 머리를 찌르는 양상이 되었다. 다음에는 둘다 엄청나게 약이 올랐는지, 심판을 볼래야 볼 수 없는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었다.

김 아무개가 찌르기를 개시하자 김추자가 식스뜨 패리로 패리한 다음 런지하면서 얼굴을 찌르자 프라임 패리로 방어하고 , 서로 동시에 찌르거나 서로 한번씩 주고 받거나 하면서 끝도 없이 무한대의 배틀로 넘어갔다. 그래도 서로 들러붙어 몸싸움을 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둘다 엉터리로 배운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아니 김 아무개는 내가 가르쳤으니 확실하지..

스몰소드와 세이버가 대등한 싸움을 펼치는 것은 일차적으로 김 아무개에게 문제가 있었다. 원래 근대검술은 항상 이성을 가지고 분노에 몸을 맡겨서는 안된다. 분노에 빠져 죽이네 살리네 하고 휘둘러서야 매우 쉽게 리포스트(반격)을 허용하고, 상대에게 버릇을 바로 들키기 때문이다. 역량을 보면 분명히 김추자가 오래 안한 만큼 후달리는 것이 보였지만, 스몰소드는 찌르기 전용의 무기이며 항상 칼끝이 전방으로 나와 있으므로 함부로 달려들면 스스로 찔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칼의 질량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원래 군용의 고전 세이버라면 질량이 크고 칼날이 넓기 때문에 스몰소드의 패리를 강제로 밀어붙여 무력화시키는 것은 물론, 스몰소드를 부러트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김 아무개의 검은 휴턴 세이버. 칼날은 폭이 좁고 얇은 대신 가드를 커다랗게 만들어놓은 전형적인 결투용 도검이라 칼날 자체의 질량이 스몰소드를 압도적으로 날려버릴 만큼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힘을 들여 베기를 시도해도 스몰소드가 안정적으로 패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턴 세이버는 칼날이 내 스몰소드 시뮬레이터보다 2cm짧다. 79cm란 말이지...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런지하면서 찌르면 맞는 건 김 아무개였다.

충분히 역량으로 압도할 수 있었지만 속에 싾인 게 많아서인지 노발대발하는 김 아무개의 행동 덕택에 이길 싸움도 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자꾸 맞는 것 때문에 더 폭주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지...

1시간이 채 못되는 정도가 되니 둘다 완전히 뻗어서 주저앉아버렸다. 원래 1시간 정도 스파링을 연속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수준이지만, 후반 30분쯤부터는 둘다 눈에 띄게 굼벵이가 되어가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역량이라기보다는 그냥 지기 싫어서 고집피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됐다! 해도 지고 그만 집에 가고 내일 하자!"

하며 일어서니 둘다 이쪽을 보면서 다죽어가는 목소리로

"누가 이겼어?"
"캇따노 다레데스까?"

하길래

"무승부, 히키와케!"

라면서 양 손을 내미니 둘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서지만 서로 노려보는 건 여전하다.

집에 가면서 김 아무개에게 한번 슬쩍 떠보았다.

"김추자 내보낼까?"
"아니! 내가 이겨서 쫓아낼거야!"

크....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두 여자의 균형은 이루어졌고, 이후로는 음식 테러 같은 건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둘은 스몰소드 vs 이탈리안 세이버의 대결로 난장판을 벌였다.

잘들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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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 3부 <신세기 괴신사집단 전습대> 13화 원곡동 습격사건
언젠가 씁니다.

* 스몰소드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도검으로, 호신용이었던 레이피어의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더이상 실전용이 아닌 장식용으로 간략화되고 크기가 줄어들어버린 종류의 도검입니다. 베기는 사실상 못하게 되어있고 찌르기만 가능한 도검으로 당시 양복에는 반드시 차야 하는 것으로 현대의 넥타이 같은 위치였습니다.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고 현대 펜싱의 플뢰레/에뻬 종목의 직접적인 조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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