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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아부 사이프의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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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대 46화 연애는 어렸을때 해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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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마봉춘과의 해프닝이 있었던 다음날의 일이다.

누군들 과거에 아쉬웠던 인연 하나 없겠냐마는.. 다들 가슴에 묻고 현실을 살아갈 따름이지 그거에 집착하고 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잊어버림으로써 웃을 수 있고 망각함으로써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연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냥 못본 척하고 지나칠 수 있을까. 명백하게 실패로 끝나고 서로 끝을 맺은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나는 그러면 그냥 지나가지는 못한다.

마침 쓰던 싸구려 마우스가 깨졌으므로 원곡동의 큰 잡화점에 로지텍 G100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사러 가던 참의 일이었다. 저녁 5시 40분쯤 잡화점에 다다랐는데, 내 옆을 지나간 여자의 얼굴이 낮이 익었다. 순간 나는 마우스를 산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녀의 얼굴을 한번 더 확인해야겠다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다.

내가 발걸음을 빠르게 했지만 인파가 워낙 많아 기척을 챌 리가 없었던지 그대로 느릿느릿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뒤쫓는 데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습대의 100%울 군청색 원단에 금단추, 해군 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으니.

"문영화?"

어깨를 붙잡고 이름을 부르며 홱 끌어당기자 그녀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악질적 루머로 중무장한 직빵 살인마 집단, 전습대원이 실명까지 언급했으니까.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듣고 모자 챙 아래의 얼굴을 본 그녀의 표정은 공포가 짙은 놀람에서 과거와 조우한 놀람으로 바뀌어갔다. 그녀의 얼굴을 본 나도 그리운 과거를 만난 것 같은 환상에 휩싸였다. 세피아색의 낡은 셀룰로이드 사진의 잔상 속의 젋은 여자아이, 화장품도 바르지 않고 모나미 153볼펜만 쓰던 수수한 아가씨에 신경이 쓰여 교실 뒤의 시계를 보는 척 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관찰하려던 나의 시선을 의식한 듯 못내 교과서만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 벌써 20년이 가까워지는 과거였지만 기억의 색이 바랠수록 가슴의 아림은 생각할 때마다 더 커져만 갔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후회도 커져만 갔었다. 숫기 없이 결국 애매한 관계만 유지하다가 흘려보낸 인연이 못내 아쉬웠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만일 삷을 다시 살게 해 준다면, 그때는 반드시 고백하고 애들 다 보는 곳에서 끌어안아 절대로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몇번을 곱씹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를 이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 둘다 30을 넘겼지만 어차피 결혼은 다들 서른 넘어서 한다. 14년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맞네, 따라와!"

그녀가 잠시 저항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둘러싸서 보고 있는데다가 내가 옷이 찢어지도록 잡아끌자 두어번 발을 헛디디다 결국 따라오기 시작했다. 앞 건물 2층에는 다행히 커피숍이 있었으므로 그녀를 사람들 사이에서 빼내어 조용히 대화를 해나가는 데 그다지 어려울 것은 없었다.

먼저 주문한 사람들을 죄다 무시하고 최우선으로 서빙된 커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커피의 아지랑이 너머에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조금 위축된 듯한 문영화가 있었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보이쉬한 단발머리였는데.. 지금은 세미롱헤어의 생머리, 하지만 머릿결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얼굴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화장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때에는 뺨에 피부트러블이 좀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건 말끔해졌다. 하지만 얼굴은 전체적으론 전혀 변하지 않았다. 수많은 옛 동창들이나 친구 여동생이 감히 과거를 연상하지 못할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워져 있던 것과는 정반대이다.

"넌 여기 왜 있어?"

날카로운 어조로 질문하자 그녀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위축된 그대로였다.

"왜 이런 위험한 데서 여자 혼자 얼쩡대고 있느냐는 말이야!"

"일... 일 때문에 그렇지..."

위축된 듯한 모습도 예전 그대로였다. 과거의 그녀는 조금 위축된 듯 말은 많지 않았지만 당찬 일면이 있었다. 모르는 것은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물어보고, 공부하는 눈빛도 달랐고, 나와의 미묘한 관계가 나날이 지속되면서 내 근처에 앉은 여자아이와 자리를 바꾸어 내 앞이나 한자리 건너 옆에 앉아있기도 했다. 나 또한 그런 그녀가 신경쓰였지만, 결국 단 한마디, 다 무너진 벽에 구멍을 낼 단 한번의 망치질을 못 해서 끝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과거에 대한 미련과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지고, 그런데도 이런 구시가지에서 공장이나 전전하는 그녀의 현실이 너무나도 짜증스러워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장이나 전전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나?"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말은 없어도 내면은 당찬 여자다. 그런 말을 듣고도 마냥 넘기는 여자는 아니다.. 말실수를 깨닫고는 어조를 낮추고 부드럽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노력했으면... 내가 봤을 때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야 될 거 아니야..."

그러면서 모자를 벗고 턱끈을 줄이며 챙 위에 얹고는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프록코트의 옷자락으로 칼자루를 가렸다. 모자를 쓰고 칼을 찬 위압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과거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 나를 본 그녀의 눈빛이 부드러워지고는 자세를 고쳐앉으면서 고개를 살짝 들어서는 나를 보기 시작했다.

"너도... 하나도 안 변했네.."

"남자들은 원래 안 변해."

"근데 왜 그렇게 살이 쪘어?"

"그런건 안 묻는게 매너다."

한결 편해진 얼굴로 웃음을 참는 그녀를 보니 나도 잠시 현실을 잊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작 그때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농담했던 적도 없었는데도.. 그녀가 흠흠 하더니 질문 공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습대엔 왜 들어갔어?"

"들어간게 아니라 내가 만든거다. 너는 소문의 퍼블릭 세션도 안보고 뭐했냐?"

그녀는 잠시 충격을 받은 듯 잠깐 조용해졌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사람들한테 칼질하고 그러는 것도 네가 시킨거야? 외국인들만 노린다는 것도..."

"뭔 소리야. 우린 경찰을 보조해서 일하는 치안 자경단이고 외국인을 노리는게 아니라 범법자를 노리는거야. 그리고 외국인 차별한다는 말 많던데 내 상전이랑 경리가 일본사람이고 참모는 중국사람이다. 그건 들어봤냐?"

"그래?"

안심한 듯 다시 얼굴이 밝아지면서 안면 가득 미소를 띄우는 걸 보니 나도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이 만남을 그냥 지나가는 추억 되새기기용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지금이야말로 내 인생의 십몇년을 보상받을 순간이다. 과거에는 숫기 없고 직설적이지 못해서 바보같이 멀어져가는 인연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는 없다. 두번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날을 되새기며 후회하며 살리라.

"애인은....있어? 결혼은 한거야?"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 쪽에서 먼저 질문해왔다. 단호히 부정하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몸은 의자에 기대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지금까지 너만 생각하고 너의 모습만을 추억하며 그걸 위안 삼아 살아왔어. 이제 공장 다닐 필요 없어."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뜨고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어두운 기운이 서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나 니 서방이야. 니 서방인데, 마누라가 서방이 다니지 말라면 마는 거지 뭘 궁상을 떨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지 내 알 바 아니고..."

순간 그녀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엄마야.. 응 일 끝났고 지금 가는 중이야. 금방 갈께? 밥은 잘 먹었...."

뒤통수를 야구방망이로 후려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애가 있다니.. 그럼.. 결혼을 했다는 말인가? 하기야 아무리 결혼 나이가 늦어졌어도 여자는 일찍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머리가 지끈지끈한게 당장이라도 대뇌가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미안해, 애가 있어서 빨리 가봐야돼. 나중에..."
"이런 니미럴 좇같은 썅!"

손으로 커피잔을 후려치자 커피가 흩뿌려지면서 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서다가 놀라서 얼어버린 그녀를 향해 증오 어린 소리가 내 입에서 쏟아졌다.

"그래 지 마누라면 서방새끼가 똑바로 간수를 해야지 이런 좇같은 곳에 돌아다니게 해? 가자, 어떤 놈인지 개 쳐 죽여버려야지!"
"제발 조용해!!"

크게 소리지른 그녀의 얼굴은 분노 그 자체였다. 원래 이렇게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는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놀라기도 했지만, 그녀의 눈가에서 넘치려고 하는 눈물이 내 심장을 옥죄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더 컸다.

"그이는 죽었어, 왜 이제 속이 시원해? 좀비사태때 임신한 나를 구하고 대신 죽었다고!"

주먹을 쥐고 눈을 감으며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안함과 짜증과 괴로움과 슬픔, 후회가 복잡하게 뒤엉켜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옥죄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고 나서 탁상의 모자를 급히 챙기고는 쓰면서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 카운터에 놓고는 커피잔 깨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급히 그녀를 따라나갔다.

"놔!"

그녀의 팔을 잡아채자 화를 내며 뿌리치려고 들었다. 하지만 강하게 붙잡고 놔주지를 않자 그 이상 반항하지는 않고 점점 조용해졌다.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이미 임자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녀가 강하게 뿌리치고 가버릴 것이 두려웠는지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 해가 졌으니까 위험해. 내가 태워다 줄게."

그러면서 그녀를 진정시키고 천천히 원곡고를 향해 걸었다. 걷는 동안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곧 관용차로 쓰이는 링컨 MKS 조수석에 서서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녀는 얼른 타려고 하지 않았다. 팔을 잡고 살짝 밀자 그제서야 탔다. 문을 닫고는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자 가솔린 차량 특유의 조용한 엔진음이 깔렸다. 아직 아주 어두워지지는 않았으므로 차간등과 안개등을 켜고는 도로로 진입했다. 한 10분 정도 달렸을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차는 좋네..."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중간에 잠깐 은행에 들른 것 외에는 그냥 갈 길만 갔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 즈음 그제서야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깐 미안했고... 네가 힘들어한다면 너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되겠어. 전 남편의 자식이고 뭐고 나에겐 상관없어. 다 내 자식들이야. 무슨..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낡고 황량해진 주공아파트 주차장 가장 안쪽에 차를 세웠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낡은 가방을 빼앗고는 그 안에 아까 찾은 100만원을 강제로 집어넣고는 바로 닫아버리고는 억지로 건네주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낡은 옷 주머니로 손을 쑥 넣어서는 그녀의 핸드폰을 빼가는 탓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의 핸드폰에 내 전화번호를 찍고는 통화 버튼을 누르자 내 핸드폰으로 벨이 울렸고, 그녀의 핸드폰에 내 이름으로 저장해놓고는 돌려주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나즈막히 말했다.

"백 안에 얼마 안되지만 넣어뒀어... 내일부터 그런 험한 데 다니지 말고.."

놀란 표정으로 백을 확인해보는 그녀에게서 도망치듯이 급히 시동을 걸고는 아파트 내 인도까지 타고 올라가며 급히 핸들을 틀어서는 빠져나왔다. 백미러에는 나를 쫓아오려다 그저 차의 뒷모습만 망연자실하게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에 그녀에게서 온 문자의 내용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십몇년을 기다렸는데.. 이제와서 며칠을 못 기다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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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대 47화 청웅 사타부언(2)
언젠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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