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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아부 사이프의 전투의 예술(Kunst des F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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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독일 검술서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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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우리 팀에 번역 르네상스가 불면서 이탈리아계 문서들도 속속 번역되고 있다. 이는 우리 팀원들의 영웅적 헌신의 힘이다. 하지만 비독일계 문서들의 본질적인 한계도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점차 느껴지기 시작한다.

독일계 문서들은 대체적으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싸움의 기본전술이나 근본원리에 대한 요소들을 짚고 넘어가고 강조하며 해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비로소 핵심적인 기술 패키지들이 뒤따른다. 이 내용들은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싸움을 어떤 식으로 해서 어떻게 응용해나갈 수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독일계 매뉴얼이 전부 다 그런 형태를 띤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비독일계 문서들은 초반에 크게 도움안되는 잡설만 적당히 써놓고 바로 자세를 언급한 다음 기술 패키지로 넘어간다. 언뜻 보기에 다양하고 실전적인 기술 패키지들을 통해 검술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하지만 기본전술, 근본원리에 대한 해설이 없이는 기술 패키지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따라해보아도 단지 그 기술만 하는 것일 뿐 싸움 자체를 끌어나가는 본질적인 철학을 알려주지 못하기에 대련을 해보면 엄청나게 어색한 행동을 반복하다가 사고성 타격으로 대련이 끝나는 식이다.

이탈리아쪽 매뉴얼을 기반으로 검술을 한다는 그룹들이 특히 이런 경향이 심했는데 이제는 왜 그러는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매뉴얼들을 토대로 검술을 재구성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기술 패키지에서의 전개과정을 토대로 무엇이 가장 많이 나오는지 가장 선호되는지를 앎으로써 싸움의 시작이나 기본 전술, 개념을 역추적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매우 힘들다. 특히 검술에 대한 숙련이 낮은 초보 그룹들이 기술 패키지 안에서 본질을 찾아내어 분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도 된다. 더군다나 기술 패키지를 보면 밑도끝도없이 검을 교차시킨 상태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어있는 것도 있는데 도대체 왜 어떤 과정을 통해 검이 십자로 교차되어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놓는다. 그런 걸 보면서 나는 이런 서술법이 옛날 마스터들이 책을 내서 얼른 봤을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오해하지만 정작 그 책을 입수해봐야 소용없게 만드는 일종의 보안 대책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실질적으로 이런 밑도끝도없이 기술 패키지부터 시작하는 책은 멀리 있지 않다. 마로쪼 오페라 노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생각난건 딱 무예도보통지였다. 그 책도 연속투로나 자세들을 실어놓고 그에 수반되는 기술 패키지를 함께 넣어놓아 마치 이 책만 있으면 검술이 가능할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놨다. 더군다나 당시는 투로만 죽어라 하는 것으로도 검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이라는 관념까지 더해 거기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본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결국 결과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술과 자세는 잘 하지만 칼싸움은 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술 패키지만 실어놓은 책들의 현실적인 용도는 하나뿐이다. 이미 검술을 충분히 배운 사람이 보고 참고하는 참고서 역할이다. 검술을 충분히 습득한 사람이라면 그런 책을 보고도 대충 기술 패키지 내부에 숨겨진 검리를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쉽게 자기 것으로 할 수도 있으며 자신이 하는 검술과 동류 내지는 비슷한 검술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전투 예시를 보면서 자기가 쓸만한 기술로 흡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내용이 이해안가게 쓰여져 있다면, 가령 서술이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해당 문파의 수련생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독자적인 용어가 많이 쓰이면 흡수 참고조차도 불가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느끼는 부분은 이탈리아계에 대한 실망감과 더불어 독일 리히테나워 무술 전통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되브링어로부터 시작하는 리히테나워류 문서가 기본전술과 개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빼먹었고 기술이나 몇개 실어놓는 것으로 끝났더라면 결국 중세 르네상스 검술의 복원은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매뉴스크립트의 작성자들은 최고 핵심을 숨기지 않고 문서에나마 풀어 후세인들이 되살릴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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