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아무개는 즉시 체육수업에서부터 진가를 드러내며 전습대원과 우호적인 스파링에서도 밀리지 않는 것을 보여준 터라 여자애들에게는 환호를, 학생 간부들에게는 주목을, 그리고 남자애들에게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예쁘장하지만 성격은 왈가닥에 이전까지 검술이라고는 제대로 구경조차 못해본 신입생들이 김 아무개를 이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긴 한데, 그래도 남자가 여자에게 지면 영 거시기하지 않는가. 나름 마쵸 부심을 가진 학생 간부들이 주목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이유에는 예쁘장하다는 것도 포함된다.
아무튼 이걸로 사내놈들이 쉽게 보고 접근하지는 못하겠지 하고 안심했는데, 김추자와 열심히 대화를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김추자는 매우 반가운 듯 했는데 둘이 직접 대화하는 경우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했고 할 말이 있으면 내가 중간에 끼어서 전해줬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약간씩 거리를 두기보다는 김 아무개 쪽에서 적극적으로 친해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고, 김추자는 그게 내심 기쁜 듯 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김 아무개를 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왠일인지 애들을 끌고 뭘 사먹으러 나간 김추자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를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그 즉시 림프액이 뇌로 역류하면서 여원홍을 종용하여 쿼드콥터 UAV를 이륙시켰는데, 금방 뭔가 이상해보이는 현장을 포착했다. 과연 여자애 한명이 주저앉아 있고, 다른 여자애들은 그 애를 감싸고 있고, 앞에 나서서 뭘 휘두르고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뭘 휘두르는 건 당연히 김 아무개였지. 앞에는 깡패놈 서넛이 있는데 두놈은 주저앉아 있었다. 뭔가 일이 생겼다 싶어서 급행하려 하는데, 갑자기 왠 사내놈이 나서서 김 아무개에게 달려드는 깡패놈을 놀라운 유술기로 아작내기 시작했다.
김 아무개는 뭔가 못마땅한지 깡패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사내놈이 제지했고, 깡패들은 이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미 급행 연락이 갔는지 UAV에 달려온 전습대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고, 사내놈은 돌아서면서 머리 위로 손을 올렸는데, 이미 어두워져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습대원들은 그를 보더니 그냥 보내주었다.
곧 돌아온 김 아무개를 보고는 피꺼솟하여 노발대발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밤에 나다니느냐 하니 김 아무개도 지지 않고 내 몸은 내가 지킬 줄 알고 그리고 m1902로 깡패를 둘이나 때려잡았다면서 대들자, 아무개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소리를 줄이고 조용히 설득을 시도했다. 원래 강끼리 부딪치면 얘는 평행선을 달리다 며칠간 말을 안하는 성격이고 설득도 물건너간다.
"좋아. 내가 가르쳤으니 잘하는 줄은 아는데 너 어떻게 벴어?"
"? 당연히 칼끝을 들어 머리 위로 세게 내리쳤지!"
"그건 잘했네. 그래서 그 깡패들이 죽었더냐?"
"뭐? 아니 왜 맨날 죽일 생각만 해? 그리고 걔들 안 죽었지만 쓰러져서 정신 못차리던데, 그럼 된거 아냐?"
"만일 그놈들이 빡친 상싸이코라서 그대로 달려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패스-백 하면서 스탑 스러스트(달려드는 상대에게 칼을 내밀어 찔리게 하는 기술) 치면 되지!"
"칼 안쪽으로 달려들었으면 어쩔건데?"
"두스텝 뒤로 돌면서 등뒤로 찌르면 되는거 아냐?"
"그게 다 니 맘대로 될 거 같애?"
"왜 트집이야!? 아 몰라! 그만해!!"
그러면서 손잡이로 찍으면 그만 아니야 하면서 조그많게 궁시렁거리는 김 아무개는 김추자와 함께 집에 가는 차 안에서 m1902가 들어있는 가죽 백을 끌어안고 아무 말도 없다가 집에 다 올 때 쯤 되서야 한두마디 중얼거렸다.
"여긴 진짜 쎈 사람 많긴 하데..."
"그러고보니 그 협객은 누구냐?"
전습대원들이 그냥 보내준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지역 시큐리티 서비스 가입자인듯 했다. 사실 이 구시가지는 어느정도 치안이 안정되면서 반대급부로 무술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시민에 대한 병법 교육을 전담하는 우리 전습대 내무교도단이 검술과 쌍놈 빳다술, 총검술을 응용한 봉술 등을 가르쳤지만 죄다 무기술이고 맨손무술을 아직 우리가 가르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맨손무술은 시민들이 따로 배우는 입장이었다.
4소대장인 덴슈 요부로 김무정은 남권의 달인으로써 권법 커리큘럼을 포함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지만 일단 나부터가 권법을 중시한 제나라가 병장기의 진나라에게 망한 고사를 들어가며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로 스터디그룹을 만드는 것은 허용한다고 했는데, 이런 연유로 여원홍을 비롯한 간부들은 물론 대원들 몇명도 김무정에게 배우기는 하고 있었다. 의외로 사람이 적은 것은 원체 2000년대 초반부터 휘몰아친 중국무술에 대한 불신 탓이었다만, 그래도 실전에서 권법을 보여준 김무정의 능력 탓에 느리게나마 점점 그룹이 커져가고 있는 입장이었다.
"몰라."
김 아무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나, 곧 가죽 칼가방을 더 끌어안으면서 말하기를,
"나 방해나 하고 존나 맘에 안들어. 만약 검술가라면 한번 붙어봤음 좋겠는데..."
사랑스런 여자아이가 된 것은 아무래도 겉모습뿐인게 틀림없다. 지금 이 발언은 흔한 무술 배운 사람이 자기 실력 확인해보고 싶어서 안달난 그런 단계에서 나오는 그거 아닌가? 난 김 아무개가 심리적으로 불안감에 빠져 살지 않게 하려고 발톱 하나 끼워준건데, 이 말이 계집이냐 사내냐? 아무래도 내 자식 교육은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음날, 점심식사가 끝나고 핫쵸코와 프렌치까페를 섞어보려는 시도를 하려는 찰나 응접실 문이 열리며 김 아무개가 쪼르르 와서는 하는 말이란 이러했다.
"어제 그 권법가 말이야, 우리 일본어 선생님이더라구!"
"엥? 도쿠가와 요시노부?"
"그 사람 이름이 도쿠와가 요시부요야? 아무튼 그사람이던데, 뭐 아는 거 있어?"
왠지 여기서 전습대 총재이며 오노하 일도류/야규 신카게류를 배운 검객이라고 한다면 얘가 요시노부를 따라다니며 맞짱 함 뜹시다 하고 다닐 게 뻔하지 싶었다. 아무개 성격상 왠지 진검으로 붙어봅시다 할 거 같은데 이러면 아무개가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다. 이기면 애 관리 못하고 하극상에 전습대 총재가 당한 것이므로 문제고, 지면 아무개가 자괴감에 빠져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지 싶었다. 그래서 우린 학교 수업에 대해선 관여 안해서 잘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어차피 김 아무개는 일본말 못하고 요시노부는 한국말 못하니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기밀은 당분간 유지되지 싶었다.
하루는 요시노부가 커다란 가방을 가져와서는 책상 옆에 두었다. 간부들이 죄다 궁금해했는데 일본어가 가능한 나와 김석원이 제일 먼저 물어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 오노하 일도류의 하비키(날을 안세운 진검)야. 왜 스틸 블런트는 자네들만 쓰는 줄 알았나?"
"흥미롭습니다. 저는 카게류 도법 조선 계통의 전인입니다."
김석원의 칼밍아웃에 요시노부가 드물게 좋아하며 관심을 보였다. 사실 카게류는 일본 4대 원류의 하나. 지금은 실전되었지만 요시노부가 배운 신카게류의 근본이 되는 유파였으므로, 관심이 없는 편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의기투합하여 철검을 이용한 스터디그룹이 결정되어서 방과후 30분 정도씩 강도 높게 훈련을 하였는데, 문제는 김 아무개가 그걸 본 것이다.
"어어 씨발 개돼지!! 구라를 쳐!?"
난데없는 폭언에 당황을 금치 못한 나와 김석원이 본 저편에는 어이털렸다는 표정으로 이쪽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김 아무개가 있었다. 요시노부도 보고는 있었지만 한국말을 못알아들으니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알 리가 없다. 김석원이 나와 김 아무개를 번갈아 보더니 아가씨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호통을 치자 일단은 도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오늘 들어가면서 노발대발의 후폭풍이 예약된 셈이므로 머리가 아파왔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용서를!"
하면서 허리를 숙이자 요시노부가 됐다면서 일어서라고 한다. 요시노부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납득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김 아무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요시노부가 말하기를
"과연... 그때 그 검객 아가씨였군. 흥미로운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나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네."
"참으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교육을 잘못 시킨 죄로.."
"아니야. 나도 젋었을 때 그랬었지. 일도류 좀 배우고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시비를 걸었고 이기기도 많이 이겼네. 가토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저때는 저럴 수 있는 법이니 충분히 이해하네."
"저 애가 이리 집착이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시는 편이..."
"아니야. 그러고보니 여기선 개인적으로 벌이는 싸움은 금지한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저 아가씨가 세상을 좀 더 넓게 보게 해 주고 싶네. 시합 날짜를 정해 주도록 하게."
"예? 아유우우...."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누가 이기든 문제다. 요시노부가 지면 아무개는 의기양양해서 부심폭발하겠지만 전습대 총재가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꼬마 아가씨에게 지면 그것도 문제고, 만일 아무개가 지면 자기가 믿어 온 검술이 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톱 빠진 고양이 신세가 되어 심리적으로 큰 불안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얼버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이미 하교 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집에 가느라 분주한 무렵이었다. 요시노부는 거래처와의 약속이 있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기 차로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요시부요 선생님! 나랑 시합 한판 해요!"
학생과 학생 간부와 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된 그 운동장 한복판에는 m1902가 든 가죽 가방을 들고 씩씩대는 김 아무개의 모습이 있었다. 156cm의 아담한 키에 흑발 생머리는 뒤로 한가닥으로 묶고 안경을 쓴 그녀의 왼쪽 눈가에는 눈물점 하나, 군청색 교복에 적당한 길이의 스커트, 검은색 물소뿔 단추 차림의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칼싸움할 복장은 아니었지만 아무개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보였다.
고개를 돌려 김 아무개를 응시하고 있던 요시노부는 이윽고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돌아선 다음,
"요시노부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김 아무개는
"요시부노 센세이! 우리 시합 한판 시마쇼!!"
라는 말도 안되는 한일합체 언어를 써가며 가죽 가방에 든 m1902를 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요시노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칼가방에서 목검 하나를 꺼내서 자세를 취했다. 김 아무개는 손에 들린 게 목검인걸 보자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 스틸 소드 플리즈! 운운하며 희한한 영어로 어떻게든 요시노부가 하비키를 꺼내게 하려고 했지만 요시노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좀 빡친 듯한 김 아무개가 왼손은 허리에 두고 오른손은 뻗고,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하여 결투 세이버 검술의 기본인 미디움 가드를 취했다. 그리고는 두어번 전진하며 마치 찌르듯이 칼을 쭉 뻗으면서 런지를 시도했다. 요시노부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목검을 들어올려 칼을 막아내었다.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안 김 아무개가 세이버 검술의 원칙대로 다시 뒤로 빠지며 미디움 가드로 복귀하는 쉬프트(Shift)를 행했으나 요시노부는 목검을 계속 맞댄 채로 아무개의 m1902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러면서 달려들자 아무개는 의외의 상황에 크게 당황한 듯 일시적으로 얼어버렸고, 요시노부는 목검을 던지고는 아무개의 세이버의 너클가드를 왼손으로 잡아서 비틀었다. 아무개는 버티려고 했지만 요시노부가 왼손으로 아무개의 새끼손가락부터 풀면서 빼내자 너무나도 간단하게 놓쳐버렸다.
아무개는 반항하려고 시도했으나 곧 요시노부에게 양손 손목을 붙들렸다. 바락바락 악을 써가며 빠져나오려고 발광을 했지만 힘에서 월등히 앞서는, 그것도 장기간 검술을 수련한 요시노부의 악력을 이길 방도가 없다. 김 아무개의 발광이 점점 극심해지자 아무개의 머리를 묶은 끈이 풀려버렸고...
이걸 구경하던 전교생은 다른 의미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김 아무개의 흑발이 머리끈이 풀리면서 찰랑거리며 흔들리는가 싶더니 김 아무개가 앞으로 넘어지는 것 같았다. 요시노부의 오른손은 아무개의 허리를, 왼손은 머리를 감싸안았고 아무개의 얼굴은 요시노부의 가슴에 파묻혀, 그야말로 안겨버리고 말았다. 그 누구도 칼싸움의 현장에서 이런 시츄에이션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김 아무개는 계속해서 반항하며 빠져나오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5분 정도가 지나자 그냥 조용히 안겨있을 뿐이었다. 10분 정도가 되자 요시노부가 팔을 풀었고 김 아무개는 힘이 완전히 빠진 듯 비틀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요시노부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아무개는 그 손을 쳐낼 힘도 없는지 그냥 가만히 쓰다듬어지는 대로 있었다.
요시노부가 돌아서자 아무개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요시노부의 차가 출발할 때쯤 내가 와서는 땅에 떨어진 m1902를 주섬주섬 주워서 가죽 가방에 넣어줄 때쯤 되자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았는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표정은 말 그대로 울상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
그야말로 폭풍 울음을 터트리며 애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안경을 쥐더니 던져버리고는 한참 울다가 분한지 운동장의 인조 잔디를 뽑아서 허공에 던져버렸으나, 역풍 탓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도로 날아와 들러붙었다. 더 서럽게 울면서 얼굴에 붙은 인조 잔디를 모아 이번엔 더 쎄게 던져버렸으나, 또다시 역풍이 불어 도로 얼굴에 들러붙었다.
좋은 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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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 3부 신세기 괴신사집단 전습대 41화 사랑의 김 아무개(3)
언젠가 씁니다.
tag : 팬픽, 다크판타지, 전습대
아무튼 이걸로 사내놈들이 쉽게 보고 접근하지는 못하겠지 하고 안심했는데, 김추자와 열심히 대화를 시도하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김추자는 매우 반가운 듯 했는데 둘이 직접 대화하는 경우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했고 할 말이 있으면 내가 중간에 끼어서 전해줬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약간씩 거리를 두기보다는 김 아무개 쪽에서 적극적으로 친해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고, 김추자는 그게 내심 기쁜 듯 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김 아무개를 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왠일인지 애들을 끌고 뭘 사먹으러 나간 김추자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를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그 즉시 림프액이 뇌로 역류하면서 여원홍을 종용하여 쿼드콥터 UAV를 이륙시켰는데, 금방 뭔가 이상해보이는 현장을 포착했다. 과연 여자애 한명이 주저앉아 있고, 다른 여자애들은 그 애를 감싸고 있고, 앞에 나서서 뭘 휘두르고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뭘 휘두르는 건 당연히 김 아무개였지. 앞에는 깡패놈 서넛이 있는데 두놈은 주저앉아 있었다. 뭔가 일이 생겼다 싶어서 급행하려 하는데, 갑자기 왠 사내놈이 나서서 김 아무개에게 달려드는 깡패놈을 놀라운 유술기로 아작내기 시작했다.
김 아무개는 뭔가 못마땅한지 깡패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사내놈이 제지했고, 깡패들은 이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미 급행 연락이 갔는지 UAV에 달려온 전습대원들의 모습이 비추어졌고, 사내놈은 돌아서면서 머리 위로 손을 올렸는데, 이미 어두워져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습대원들은 그를 보더니 그냥 보내주었다.
곧 돌아온 김 아무개를 보고는 피꺼솟하여 노발대발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밤에 나다니느냐 하니 김 아무개도 지지 않고 내 몸은 내가 지킬 줄 알고 그리고 m1902로 깡패를 둘이나 때려잡았다면서 대들자, 아무개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소리를 줄이고 조용히 설득을 시도했다. 원래 강끼리 부딪치면 얘는 평행선을 달리다 며칠간 말을 안하는 성격이고 설득도 물건너간다.
"좋아. 내가 가르쳤으니 잘하는 줄은 아는데 너 어떻게 벴어?"
"? 당연히 칼끝을 들어 머리 위로 세게 내리쳤지!"
"그건 잘했네. 그래서 그 깡패들이 죽었더냐?"
"뭐? 아니 왜 맨날 죽일 생각만 해? 그리고 걔들 안 죽었지만 쓰러져서 정신 못차리던데, 그럼 된거 아냐?"
"만일 그놈들이 빡친 상싸이코라서 그대로 달려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패스-백 하면서 스탑 스러스트(달려드는 상대에게 칼을 내밀어 찔리게 하는 기술) 치면 되지!"
"칼 안쪽으로 달려들었으면 어쩔건데?"
"두스텝 뒤로 돌면서 등뒤로 찌르면 되는거 아냐?"
"그게 다 니 맘대로 될 거 같애?"
"왜 트집이야!? 아 몰라! 그만해!!"
그러면서 손잡이로 찍으면 그만 아니야 하면서 조그많게 궁시렁거리는 김 아무개는 김추자와 함께 집에 가는 차 안에서 m1902가 들어있는 가죽 백을 끌어안고 아무 말도 없다가 집에 다 올 때 쯤 되서야 한두마디 중얼거렸다.
"여긴 진짜 쎈 사람 많긴 하데..."
"그러고보니 그 협객은 누구냐?"
전습대원들이 그냥 보내준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지역 시큐리티 서비스 가입자인듯 했다. 사실 이 구시가지는 어느정도 치안이 안정되면서 반대급부로 무술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시민에 대한 병법 교육을 전담하는 우리 전습대 내무교도단이 검술과 쌍놈 빳다술, 총검술을 응용한 봉술 등을 가르쳤지만 죄다 무기술이고 맨손무술을 아직 우리가 가르칠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맨손무술은 시민들이 따로 배우는 입장이었다.
4소대장인 덴슈 요부로 김무정은 남권의 달인으로써 권법 커리큘럼을 포함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었지만 일단 나부터가 권법을 중시한 제나라가 병장기의 진나라에게 망한 고사를 들어가며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로 스터디그룹을 만드는 것은 허용한다고 했는데, 이런 연유로 여원홍을 비롯한 간부들은 물론 대원들 몇명도 김무정에게 배우기는 하고 있었다. 의외로 사람이 적은 것은 원체 2000년대 초반부터 휘몰아친 중국무술에 대한 불신 탓이었다만, 그래도 실전에서 권법을 보여준 김무정의 능력 탓에 느리게나마 점점 그룹이 커져가고 있는 입장이었다.
"몰라."
김 아무개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나, 곧 가죽 칼가방을 더 끌어안으면서 말하기를,
"나 방해나 하고 존나 맘에 안들어. 만약 검술가라면 한번 붙어봤음 좋겠는데..."
사랑스런 여자아이가 된 것은 아무래도 겉모습뿐인게 틀림없다. 지금 이 발언은 흔한 무술 배운 사람이 자기 실력 확인해보고 싶어서 안달난 그런 단계에서 나오는 그거 아닌가? 난 김 아무개가 심리적으로 불안감에 빠져 살지 않게 하려고 발톱 하나 끼워준건데, 이 말이 계집이냐 사내냐? 아무래도 내 자식 교육은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음날, 점심식사가 끝나고 핫쵸코와 프렌치까페를 섞어보려는 시도를 하려는 찰나 응접실 문이 열리며 김 아무개가 쪼르르 와서는 하는 말이란 이러했다.
"어제 그 권법가 말이야, 우리 일본어 선생님이더라구!"
"엥? 도쿠가와 요시노부?"
"그 사람 이름이 도쿠와가 요시부요야? 아무튼 그사람이던데, 뭐 아는 거 있어?"
왠지 여기서 전습대 총재이며 오노하 일도류/야규 신카게류를 배운 검객이라고 한다면 얘가 요시노부를 따라다니며 맞짱 함 뜹시다 하고 다닐 게 뻔하지 싶었다. 아무개 성격상 왠지 진검으로 붙어봅시다 할 거 같은데 이러면 아무개가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다. 이기면 애 관리 못하고 하극상에 전습대 총재가 당한 것이므로 문제고, 지면 아무개가 자괴감에 빠져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지 싶었다. 그래서 우린 학교 수업에 대해선 관여 안해서 잘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어차피 김 아무개는 일본말 못하고 요시노부는 한국말 못하니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기밀은 당분간 유지되지 싶었다.
하루는 요시노부가 커다란 가방을 가져와서는 책상 옆에 두었다. 간부들이 죄다 궁금해했는데 일본어가 가능한 나와 김석원이 제일 먼저 물어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 오노하 일도류의 하비키(날을 안세운 진검)야. 왜 스틸 블런트는 자네들만 쓰는 줄 알았나?"
"흥미롭습니다. 저는 카게류 도법 조선 계통의 전인입니다."
김석원의 칼밍아웃에 요시노부가 드물게 좋아하며 관심을 보였다. 사실 카게류는 일본 4대 원류의 하나. 지금은 실전되었지만 요시노부가 배운 신카게류의 근본이 되는 유파였으므로, 관심이 없는 편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의기투합하여 철검을 이용한 스터디그룹이 결정되어서 방과후 30분 정도씩 강도 높게 훈련을 하였는데, 문제는 김 아무개가 그걸 본 것이다.
"어어 씨발 개돼지!! 구라를 쳐!?"
난데없는 폭언에 당황을 금치 못한 나와 김석원이 본 저편에는 어이털렸다는 표정으로 이쪽으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김 아무개가 있었다. 요시노부도 보고는 있었지만 한국말을 못알아들으니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알 리가 없다. 김석원이 나와 김 아무개를 번갈아 보더니 아가씨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호통을 치자 일단은 도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오늘 들어가면서 노발대발의 후폭풍이 예약된 셈이므로 머리가 아파왔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용서를!"
하면서 허리를 숙이자 요시노부가 됐다면서 일어서라고 한다. 요시노부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납득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김 아무개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면서 요시노부가 말하기를
"과연... 그때 그 검객 아가씨였군. 흥미로운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나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네."
"참으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교육을 잘못 시킨 죄로.."
"아니야. 나도 젋었을 때 그랬었지. 일도류 좀 배우고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시비를 걸었고 이기기도 많이 이겼네. 가토 선생님을 만나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저때는 저럴 수 있는 법이니 충분히 이해하네."
"저 애가 이리 집착이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시는 편이..."
"아니야. 그러고보니 여기선 개인적으로 벌이는 싸움은 금지한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저 아가씨가 세상을 좀 더 넓게 보게 해 주고 싶네. 시합 날짜를 정해 주도록 하게."
"예? 아유우우...."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누가 이기든 문제다. 요시노부가 지면 아무개는 의기양양해서 부심폭발하겠지만 전습대 총재가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꼬마 아가씨에게 지면 그것도 문제고, 만일 아무개가 지면 자기가 믿어 온 검술이 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톱 빠진 고양이 신세가 되어 심리적으로 큰 불안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얼버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이미 하교 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집에 가느라 분주한 무렵이었다. 요시노부는 거래처와의 약속이 있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기 차로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요시부요 선생님! 나랑 시합 한판 해요!"
학생과 학생 간부와 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된 그 운동장 한복판에는 m1902가 든 가죽 가방을 들고 씩씩대는 김 아무개의 모습이 있었다. 156cm의 아담한 키에 흑발 생머리는 뒤로 한가닥으로 묶고 안경을 쓴 그녀의 왼쪽 눈가에는 눈물점 하나, 군청색 교복에 적당한 길이의 스커트, 검은색 물소뿔 단추 차림의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칼싸움할 복장은 아니었지만 아무개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보였다.
고개를 돌려 김 아무개를 응시하고 있던 요시노부는 이윽고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돌아선 다음,
"요시노부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김 아무개는
"요시부노 센세이! 우리 시합 한판 시마쇼!!"
라는 말도 안되는 한일합체 언어를 써가며 가죽 가방에 든 m1902를 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요시노부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칼가방에서 목검 하나를 꺼내서 자세를 취했다. 김 아무개는 손에 들린 게 목검인걸 보자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 스틸 소드 플리즈! 운운하며 희한한 영어로 어떻게든 요시노부가 하비키를 꺼내게 하려고 했지만 요시노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좀 빡친 듯한 김 아무개가 왼손은 허리에 두고 오른손은 뻗고,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하여 결투 세이버 검술의 기본인 미디움 가드를 취했다. 그리고는 두어번 전진하며 마치 찌르듯이 칼을 쭉 뻗으면서 런지를 시도했다. 요시노부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목검을 들어올려 칼을 막아내었다.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안 김 아무개가 세이버 검술의 원칙대로 다시 뒤로 빠지며 미디움 가드로 복귀하는 쉬프트(Shift)를 행했으나 요시노부는 목검을 계속 맞댄 채로 아무개의 m1902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러면서 달려들자 아무개는 의외의 상황에 크게 당황한 듯 일시적으로 얼어버렸고, 요시노부는 목검을 던지고는 아무개의 세이버의 너클가드를 왼손으로 잡아서 비틀었다. 아무개는 버티려고 했지만 요시노부가 왼손으로 아무개의 새끼손가락부터 풀면서 빼내자 너무나도 간단하게 놓쳐버렸다.
아무개는 반항하려고 시도했으나 곧 요시노부에게 양손 손목을 붙들렸다. 바락바락 악을 써가며 빠져나오려고 발광을 했지만 힘에서 월등히 앞서는, 그것도 장기간 검술을 수련한 요시노부의 악력을 이길 방도가 없다. 김 아무개의 발광이 점점 극심해지자 아무개의 머리를 묶은 끈이 풀려버렸고...
이걸 구경하던 전교생은 다른 의미로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김 아무개의 흑발이 머리끈이 풀리면서 찰랑거리며 흔들리는가 싶더니 김 아무개가 앞으로 넘어지는 것 같았다. 요시노부의 오른손은 아무개의 허리를, 왼손은 머리를 감싸안았고 아무개의 얼굴은 요시노부의 가슴에 파묻혀, 그야말로 안겨버리고 말았다. 그 누구도 칼싸움의 현장에서 이런 시츄에이션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김 아무개는 계속해서 반항하며 빠져나오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5분 정도가 지나자 그냥 조용히 안겨있을 뿐이었다. 10분 정도가 되자 요시노부가 팔을 풀었고 김 아무개는 힘이 완전히 빠진 듯 비틀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요시노부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아무개는 그 손을 쳐낼 힘도 없는지 그냥 가만히 쓰다듬어지는 대로 있었다.
요시노부가 돌아서자 아무개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요시노부의 차가 출발할 때쯤 내가 와서는 땅에 떨어진 m1902를 주섬주섬 주워서 가죽 가방에 넣어줄 때쯤 되자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았는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표정은 말 그대로 울상이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
그야말로 폭풍 울음을 터트리며 애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안경을 쥐더니 던져버리고는 한참 울다가 분한지 운동장의 인조 잔디를 뽑아서 허공에 던져버렸으나, 역풍 탓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도로 날아와 들러붙었다. 더 서럽게 울면서 얼굴에 붙은 인조 잔디를 모아 이번엔 더 쎄게 던져버렸으나, 또다시 역풍이 불어 도로 얼굴에 들러붙었다.
좋은 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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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 3부 신세기 괴신사집단 전습대 41화 사랑의 김 아무개(3)
언젠가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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